안녕, 로뎀나무
곰곰이 생각해보니 연초(年初)부터 그랬다. 나의 모습이 로뎀나무 아래 초라한 엘리야 같았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사실 그 세상 소리는 내 내면의 소리였다. 그 소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지쳤다.” 그렇다. 번아웃(burn out)까지는 아니었지만 영적침체는 분명했다. 기쁨은 흐르지 않고 평안은 마른 것 같은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런 날들이 더 계속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나님께서 늦지 않게 찾아와 주셨다. 그런데 고난을 가지고 찾아 오셨다. 물론 의미 있는 고난이었고 또 고난만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셨다. 입을 열면 마실 수 있는 은혜의 샘물을 가지고 오셨다. 마음을 뜨겁게 하는 말씀도 가지고 오셨다. 따듯하게 다시 보듬어 주시고 손을 붙잡아 일으켜 주셨다. 끝이 중요하다. 내가 왜 유종(有終)의 미(美)를 거둘 수 없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더 머뭇거리겠는가. 더 이상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말했다. “안녕, 로뎀나무”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드라마를 보신 적이 있으셨던가. 반전(反轉)이 없는 소설을 읽으신 적이 있으셨던가. 만약 그런 20부작 드라마를 보고 그런 다섯 권짜리 연재소설을 읽었다면 공연(空然)히 보았으니 내 시간 내놓으라, 내 돈 내놓으라고 손해청구도 불사(不辭)할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up down이 없는 인생은 없다. 물론 그런 신앙생활도 없다. 크고 작은 영적침체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로뎀나무 아래를 영적침체의 자리라 할 수 있다. 로뎀나무 이야기는 화려한 갈멜산 이야기와 놀라운 호렙산 이야기 사이에 어두운 골짜기처럼 자리 잡고 있다. 로뎀나무 아래는 “내가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보다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이다. “다시 일어나라”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이제 끝내고 싶다”는 내면의 외침이 제법 그럴 듯 들리는 자리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닌 데 스스로 “끝”이라고 선언하는 로뎀나무 아래는 결코 오래 머물 장소가 아니다. 그러므로 더 늦기 전에 드라마와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런 새로운 반전을 선언하자. “안녕, 로뎀나무”
화장품의 역사는 얼마나 되었을까? 그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같다. 화장품은 진정한 자기 모습을 숨긴다. 화장은 자기의 못남과 약점에 거꾸로 “beautiful”이라는 찬사를 받아내는 놀라운 기술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무 잎으로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감추었다. 최초의 화장품(化粧品)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로뎀나무는 확연히 인식할 수 있는 갈멜산과 호렙산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것으로 위장된 로뎀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의심, 절망, 열등감, 두려움, 죄책감, 그리고 왜곡된 자아상을 슬쩍 감추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고 지내는 자들이 많다.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꽤 좋아하는 것처럼 표현하는 일들도 있다. 직분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지도 않으면서 믿음이 대단한 척 하고 마음에도 없는 헌신의 시간을 속절없이 보내는 자들도 있다. 모두가 위장된 로뎀나무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먼데 어찌 로뎀나무를 다른 나무인 것처럼 감추고 그 길을 걷겠는가. 우리는 위장과 화장으로부터 진정한 우리 자신을 다시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용기를 가지고 다른 나무처럼 서있는 로뎀나무에게 이렇게 말하자. “너 로뎀나무 맞지? 나는 진정한 나를 찾고 싶어. 나를 그만 힘들게 해. 이제, 이제는 너와 헤어져야겠다. 안녕, 로뎀나무.”
02.20.2021
미주크리스천신문 발행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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