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달력
좌~악 뜯어내니 달랑 한 장 남았다. 숱한 사연을 싣고 한 장 한 장 뜯겨나가던 2020년의 달력이 드디어 그 마지막 모습을 드러냈다. 마지막이란 비장하고도 결연한 단어이다. 올해의 교회 달력 마지막에는 눈 내린 뜨락 가운데에 작은 분수대가 있고 뜨락을 감싼 몇 그루의 나무들이 서있는 사진이 있다. 그 뒤에 뾰쪽한 탑을 세운 교회가 몇 채의 집과 어울려져 있고 그 위로 맑은 겨울 하늘이 조용히 펼쳐져 있다. 슬플 이유가 없는 사진인데 계속 바라보자니 슬프다. 올해의 많은 아픔의 이야기를 뒤에서 듣다가 속으로 울고 울어서 그런가. 마지막 달, 서른 한 날이 주어졌다. 무엇인가 포기하기에는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 그렇다고 무언가 새로 시작하기에는 촉박한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잘한 것도 다 허물어질 수 있는 시간인가하면 지금까지 못한 것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낙심도 말고 방심도 말고 마지막 남은 한 달을 지혜롭게 살아야 한다.
서른 한 날 가운데 단연코 눈길을 끄는 날짜는 25일이다. 성탄절이다. “그 어린 주 예수 눌 자리 없어/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네/ 저 하늘의 별들 반짝이는데/ 그 어린 주 예수 꼴 위에 자네” 그 귀하신 몸이 구유에 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그곳에 오셨다. 우리를 구하려. 우리를 살리려. 우린 무엇 때문에 그 분의 눌 자리를 내드리지 못했던가. 그 분이 오시는 것도 모를 정도로 바빴나? 아니면 다른 것으로 꽉 채워져 그 분을 맞을 공간이 정말 없었나? 구유에 구주로 오신 성탄의 12월이 없었으면 우린 어떻게 되었을까? 어릴 적 교회 선생님들이 가르쳐준 율동과 함께 부른 어린이 찬송이 있다.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울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 멀리 퍼진다/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도 탄일종이 울린다” 단순하여 재미있게 불렀지만 매우 선교적(?) 어린이 찬송이었음을 훗날 깨닫게 되었다.
마지막 달력에 이런 성경 구절이 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사40:8). 마르는 것이 풀 만이랴, 시드는 것이 꽃 만이랴. 그것을 올해 똑똑히 보았다. 영원한 것이 이 땅에 없다는 것을. 모든 것이 시들고 마른다. 그것이 한계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말씀만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 이 말씀을 붙잡는 자는 마지막이란 단어가 두렵지 않다. 이 세상의 어떤 마지막도 넘고 넘어 영원에 이르기 때문이다. 고통과 아픔을 갖고 온 2020년에 수많은 사람들이 비틀거리고 쓰러지지만 말씀의 사람들은 누구나 치유와 회복을 누림은 물론 날로 새로워진다.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는 2020년을 딛고 계속 흥왕케 된다.
마지막 달력에 원로목사님 성함이 있다. 지난 4월 10일, 성금요일 오후에 하나님의 품에 안기신 귀한 목사님이시다. 목사님의 성함은 달력에만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마지막 달력을 내리고 잊을 분이 아니다. 내 마음에 내 삶에 새겨져 계시다.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내 삶에서 오랫동안 담임으로 모셨던 목사님, 훗날에는 원로목사님으로 모셨던 목사님. 내겐 목사님이란 직분으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분을 어찌 쉽게 잊겠는가. 마지막 달력은 많은 이야기를 품고 내 곁에 한 달 있을 예정이다. 뚜벅뚜벅 하루하루를 걸어갈 달력은 잊지 못할 2020년 끝나가고 있음을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12/05/2020
미주크리스천신문 발행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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