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갈 수 없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누구도 팬데믹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 갈 수 없다. 그래서 그런가, 새삼 내 맘에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다. “내놀던 옛 동산에 오늘와 다시 서니/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예 섰던 그 큰 소나무 베어 지고 없구료/ 지팡이 도루 짚고 산기슭 돌아서니/ 어느해 풍우엔지 사태져 무너지고/ 그 흙에 새 솔이 나서 키를 재려 하는구료” 아무리 그리워한들 옛 동산은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이 그곳에 번지고 있다는 애절함과 기대감이 섞인 노래 말이 내 마음에 와 닿는 것이다. 그렇다. 팬데믹 이전의 세상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익숙하게 놀던 옛 동산의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힘들지만 가야할 새 길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누구도 1983년 1월 3일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미주크리스천신문이 세상에 태어난 그 날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후 37년이 지났고 오늘로 지령(紙齡) 1800호가 발간된다. “문서를 통해 땅 끝까지 복음전파”라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신문은 힘든 일도 많이 있었고 인터넷, 스마트폰, 인공지능 등의 새롭고도 벅찬 환경들을 계속 만났지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옛날로 돌아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히스핑거(His Finger)출판사와 히스핑거몰(His Finger Mall)이 미주크리스천신문사의 이름으로 세워져 활동의 지경이 넓어졌다. 그 어떤 도전과 유혹이 있어도 미주크리스천신문은 하나님의 소명과 필자들의 정성과 독자들의 후원을 멀리하고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던 1983년 1월 3일 이전으로 결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교회는 종교개혁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팬데믹이나 미주크리스천 신문의 영향력과는 견줄 수 없는 거대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 종교개혁인데 작금의 모습에는 종교개혁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무엇보다 교리가 그렇다. 마틴 루터는 온갖 고행이 구원의 길인 줄 알고 그 가운데 신음하다가 성경에 눈을 뜨고 마침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말씀을 붙잡고 일어서지 않았던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빛나는 진리는 어디가고 다시 자력(自力) 구원의 길로 가려는 개신교도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종교개혁을 향해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자는 저주가 있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은 로마가톨릭의 트렌트종교회의는 다름 아닌 다시 옛날로 돌아가자는 음흉한 노래였다. 종교개혁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 종교개혁자들이 새로운 동산에서 꺾어 손에 쥐어 꽃을 던져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 꽃 이름은 튤립(TULIP)이다. 네덜란드를 주산지로 하는 아름다운 꽃 튤립. 신학적 격전장이었던 네덜란드 도르트에서 묶여져 손에 들려진 그 꽃을 버린다는 것은, 다시 가서는 안 되는 종교개혁의 이전 길로 가려는 어리석은 시도이다. 종교개혁의 후예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다섯 개 교리의 첫 글자를 모은 것이 TULIP이다. 결코 시들지 않을 아름다운 꽃이지 않은가. Total Depravity: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Unconditional Election: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다. Limited Atonement: 주님의 속죄는 택한 자를 위한 것이다. Irresistible Grace: 택함을 받은 자는 구원을 거절할 수 없다. Perseverance of the Saint; 구원받는 자는 끝까지 지켜진다.
종교개혁의 처음과 끝은 말씀이 옳다고 하면 옳다고 아멘 하는 것이요, 말씀이 아니라고 하면 거침없이 아니요 라고 외치는 것이다. 말씀의 회복을 품은 종교개혁의 횃불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벽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 세상을 새롭게 바꾸었다. 그런데 지난 503년 동안 왜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그동안 서로 작은 오해만 있었던 것처럼, 로마가톨릭과 정겹게 어깨동무한 개신교도들이 있다. 그들과의 어깨동무가 무엇이냐고 펄쩍 뛰면서도 그 정신과 실제 내용은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간 개신교도들도 있다. 그럴 수 없다. 종교개혁은 종교개혁 이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 더구나 종교개혁은 503년 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면 그리고 머물러 있을 수도 없다면 종교개혁의 단 하나의 방향은 앞으로 나가는 것이다. 아직까지 내 자신이 변화되지 않은 한, 교회가 말씀을 가르침과 삶의 유일한 원리로 삼지 않은 한, 세상이 여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한, 종교개혁은 미완(未完)의 개혁이다.
그렇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팬데믹 이전으로도. 1983년 1월 3일 이전으로도. 그리고 물론 1517년 10월 31일 이전으로도. 우리는 간다. 미래라는 새로운 길을 걷는다. 우리는 확신한다. 암울한 미래가 아니라 희망의 미래를. 우리는 신뢰한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 하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날들로 결코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10.31.2020
미주크리스천신문 발행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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