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냐 기독교냐
모든 사람은 종교심을 가지고 있다. 그 종교심으로 수많은 종교를 만들어 그 안에서 안녕(安寧)과 복을 도모(圖謨)한다. 기독교는 그런 종교심에서 출발한 종교의 아류(亞流)가 아니다. 기독교는 일반종교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요소들과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배치(背馳)되기 때문이다. 종교는 그들이 믿는 신 자체를 아는 일에 힘을 쓰지 않는다. 실상은 존재치도 않는 그들 신의 실체 여부(與否)를 진지하게 알아보려고도 않으니 그 신의 성품을 제대로 알 턱이 없다. 종교는 막연히 자기들의 신을 몹시 무서워하며 신의 비위(脾胃)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서글픈 순종을 한다. 종교는 자기들의 신의 영광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오직 자기가 잘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요 기도의 내용이다. 종교는 구원이 자기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처절하게 온갖 노력을 다한다.
기독교는 사람의 종교심에서 출발하여 세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세워졌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계시의 주체시요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기독교는 무서워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과 행하신 위대한 일 때문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순종한다.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기독교의 기도는 나의 소원에 집착(執着)하지 않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우선으로 하고 있다. 기독교는 자기가 알아서 구원의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선물로 받는다. 따라서 타력(他力) 구원으로 인한 감격의 찬송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이렇듯 종교와 기독교는 출발, 과정, 목표가 완전히 다르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사람의 종교심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복음이 견고히 자리 잡고 있다. 종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형식은 몰라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일말(一抹)의 유사성도 없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와도 견줄 수 없는 배타적(排他的)이요 독보적(獨步的)인 진리이다. 그런데 기독교 안에서 이런 배타성과 독보성을 무시하고 은근히 또는 노골적으로 종교와 손을 잡으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다. 기독교 안에서의 다원주의(多元主義)는 원래 성립될 수 없는 말이다. 기독교 안에 다른 종교를 옹호하고 수용하는 주제넘은 관대함은 전혀 필요도 없고 결코 있어서도 안 된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될 수 있단 말인가(고후6:15). 기독교가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종교 중의 한자리에 가서 앉아 있을 수 있다.
종교와 기독교의 차별성은 선명(鮮明)하다. 그 차별성은 종교적인 사람과 기독교인의 삶으로도 입증되어야 한다. 제한된 영역에서 종교적인 모습을 보이는 종교생활을 기독교인의 삶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나올 때 마음속으로 “하나님 안녕히 계셔요. 다음 주일날 또 만나요” 라는 심사(心思)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엄연히 종교인이다. 주일 그리고 교회에만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복음의 생명력이 역동적으로 드러나야 기독교인이다. 스스로의 삶을 통합적으로 살펴본다면 나는 과연 모호한 종교인인가 온전한 기독교인인가?
09.26.2020
미주크리스천신문 발행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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