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일 오후
어느 덧 6월이 된다. 적어도 5월말이 되면 다소 변화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여러 상황이 여전히 녹록치 않다. 아무리 힘들어도 희망을 내려놓을 수 없다. 포기는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니다. 포기는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불러온다. 포기는 절망과 패배의 친구다. 그렇다. 인생은 패배했을 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포기했을 때 끝나는 것이다. 6월은 무엇인가 포기하기에는 너무나 푸르른 계절이다. “6월의 절망”은 너무 사치한 표현이다. “6월 2일 오후”라는 이야기를 들어 보자. 요한 웨슬리 목사님의 어느 해 일기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이다.
5월 5일 오전: 세인트앤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가서 다시 오지 마시오!” 오후: 세인트존교회에서 설교했다. 교회 집사들이 “당장 나가서 절대 다시 오지 마시오”라고 했다. 5월 12일 오전: 세인트유다교회에서 설교했다. 다시는 그곳에 갈 수 없다. 오후: 세인트조지교회에서 설교했다. 다시 쫓겨났다. 5월 19일 오전: 세인트앤드류교회에서 설교했다. 나더러 다시 발도 붙이지 말라고 했다. 오후: 거리에서 설교했다. 거기서도 쫓겨났다. 5월 26일 오전: 초원에서 설교했다. 황소고삐가 풀리는 바람에 도망쳤다. 6월 2일 오전: 마을 변두리에서 설교했다. 마을 밖으로 추방당했다. 오후: 목장에서 설교했다. 만 명의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러 왔다.
5월은 물론 6월 2일 오전까지도 볼 수 없었던 일이 그 날 오후에 벌어진 것이다. 일만 명이 참석한 집회가 그때 펼쳐진 것이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6월 2일 오전에 “내가 이토록 노력해도 사람들은 몰라주고 내 마음만 아프니 전도자의 삶을 포기하자”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는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았다. 어려운 환경에 주눅 들지 않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대반전의 6월 2일 오후를 맞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대반전의 6월 2일 오후가 있다. 가슴의 희망이 눈앞의 실체가 될 그 날, 그 시간이 있다. 흔들리지 않고 자라는 꽃이 어디 있겠는가. 바람은 꽃을 잘 자라게 하고 짙은 향기를 토하게 하는 꽃의 절친이다. 넘어짐은 또 어떤가.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잠언 24:16). 넘어짐 없이 걷고 또 어른 된 사람이 있는가. 없다, 한 명도 없다. 일곱 번씩 넘어지는 것이 왜 문제이겠는가. 그것이 무슨 부끄러움이겠는가. 넘어지고도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문제요 부끄러움이다. 6월 2일 오후는 누구에게나 온다. 그 날이 오기 전에 포기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역경 속에서 희망을 붙잡지 않고도 우뚝 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경에도, 역사에도,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은 아직까지 아무도 없다. 6월 2일 오후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주변을 힘들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프시게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려움을 주셔서 절망과 포기케 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 어려움 가운데 희망 갖게 하시고 그 어려움 없이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성장과 성숙을 선물로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들리시는가. “째깍 째깍” 6월 2일 오후가 다가오는 시계 소리가.
05.30.2020
미주크리스천신문 발행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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